2. 백전무패의 노장 휘슬
2. 백전무패의 노장 휘슬
그랜트와 헤어지고 나는 언제쯤 집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할지 고민을 했다. 다른 무엇보다 가장 곤란한 사실은,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 집이 이미 결혼상대인 그녀의 집에서 보낸 예물을 거의 써버린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마냥 고민만 앞서던 시기, 그랜트는 비밀장소로 노장 휘슬씨를 직접 데려왔다. 비밀장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휘슬씨는 마음 편히 쉬기 좋은 곳이라며 웃으며 자신도 종종 들려도 되냐며 편하게 웃었다. 그렇게 휘슬씨와는 금세 친해졌고, 신전과 출발 준비로 바빴던 그랜트보다 휘슬씨가 더 자주 비밀장소를 찾게 되었다.
“모험가 길드나 신전, 그런 답답한 곳보다 여기가 편하네.”
휘슬씨의 그런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직접 담근 술을 대접했고, 시원하게 술을 들이킨 휘슬씨는 술맛마저 일품이라며 여기가 지상낙원이라는 농담을 했다. 나는 함께 술을 마시며 내 사정을 휘슬씨에게 상담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선 더 늦어지면 나만 더욱 곤란해질 뿐이라고 말하며, 서둘러 우리 집에 파혼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신부측에는 직접 사과하라고 했다. 진지하게 말을 하던 휘슬씨는 환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친구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진정한 남자라며, 보기 드문 청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신부측에 사과하러 갈 때는 자신도 동행해 주겠노라고 하여 나는 연신 감사 인사를 드렸다.
휘슬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용사 파티에 참가하겠다고 말했고, 그날 나는 몸살을 크게 앓을 정도로 아버지에게 얻어맞았다. 술을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였음에 나는 맞는 것에 익숙해 있었지만, 멀쩡한 정신에도 하는 폭력, 하지만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갑자기 내 멋대로 정한 결정 탓에 이제 막바지에 이른 결혼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책임감 때문에.
다음날 나를 데리러 온 휘슬씨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린, 자네 정말 괜찮겠나. 비록 옆마을이 가깝다고는 하나, 그런 몸을 이끌고..”
“정말 괜찮습니다.”
“자네는 정말 보기드문 청년이네. 정말.”
피떡이 된 내 몰골을 보고 안쓰럽다고 말하는 휘슬씨. 마을에 도착하고 이 마을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잠시 만나고 오겠다고 먼저 신부의 집으로 가보라고 말한 휘슬씨가 말했다. 그렇게 휘슬씨와는 마을 입구에서 헤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찾아간 신부의 집, 문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문 앞에 나타난 그녀의 부모님에게 무릎을 꿇었다. 용사일행에 참가하게 되었으므로 약혼이 취소되었다고 말했고, 약혼녀가 될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은 내게 주먹질을 했다. 나는 묵묵히 그들의 폭력과 폭언을 받았고, 한참의 주먹질이 계속되었다. 이내 지친 그녀는 토라져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그녀의 부모님은 아직도 열이 식지 못한 듯, 한껏 쏘아붙이며 말했다.
“우리 딸아이를 어쩌란 말인가! 결혼 준비 막바지에 남자 측에서 차버린 여자를 누가 데려가! 이제 우리 딸아이는 시집도 못 갈거란 말이네! 이 책임을 어떻게 질건가!”
나는 어쩔 도리를 몰라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고, 지참금으로 건넨 돈은 몇 년이 걸려도 꼭 갚겠노라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의 화는 풀릴 생각이 없었고, 화가 잔뜩 담긴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똑똑, 그때 울린 노크소리에 발길질이 멈췄다. 문을 두드린 사람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했고, 그녀의 부모님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장로라는 노인의 옆에는 휘슬씨가 함께 있었다. 휘슬씨는 내 모습을 보고 크게 놀라며 내게 달려와 내 안위를 살폈다. 나는 괜찮다고 쓰게 웃어보였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휘슬씨는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장로님은 내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부부에게 호통을 쳤다.
“자네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비록 결혼이 무산되었다고는 하나, 원래 사위가 되었을 사내에게 이렇게까지 하다니!”
부부는 자신들도 좀 심했다고 느꼈는지 말을 아꼈다. 그런 그들에게 장로님은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자네들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화가 난건지 잘 아네. 결혼의 막바지에 이 상황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나. 하지만 이건 아니지. 직접 사과하러 온 사람에게 어찌 이렇게 까지 한단 말인가!”
뚱한 표정의 부부에게서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듯 퉁명한 대답이 나왔다. 장로님은 그런 부부를 보며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장로는 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금화와 비단, 기타 예물들, 다 포함해서 사용한 금액이 대략 십골드 정도라고 알고 있네, 그리고 여기 세배인 삼십골드를 준비했네.”
그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부부와 나는 장로님을 바라봤다. 휘슬씨는 너그럽게 웃으며 내게 귓속말로 말했다.
“내가 괜히 불패의 노장이라고 불리는 줄 아나, 그동안 모험으로 벌어놓은 돈도 많고 인맥도 많네. 걱정하지 마.”
그 말에 장로님이 말한 삼십골드가 휘슬씨의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마 이런 민폐를 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미안한 마음에 점점 숙여지는 고개, 그런 나의 어깨를 쓰다듬어 주는 휘슬씨.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그의 행동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우리와는 다르게 장로님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자네들만 괜찮다면 자네의 딸을 에디스 백작의 시녀로 채용하려고 하는데 어떤가?”
그 말에 부부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래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굽신거렸다. 무기를 들거나 뛰어난 두뇌를 가졌거나, 종교의 귀의하거나, 특출난 마력을 가져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일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그건 여자도 남자도 마찬가지로 나만해도 겨우 아버지에게 농사일을 배워 한사람 몫을 할 뿐이었다.
다만 특별한 케이스로, 좋은 기회를 잡아 유명한 귀족의 시종이나 첩살이를 하는 방법이 있었다. 게다가 에디스 백작은 옆마을인 우리 마을에서도 알려질 정도로 공명정대하고 시종들에게도 잘해주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게다가 시종들이 받을 봉급도 다른 귀족들의 시종들에 비해 몇배나 될 만큼 후한 대접을 해줬다. 그런 좋은 자리를 제안했으니, 부부의 표정이 밝아 질만도 했다.
장로님은 부부와 대화를 마치고 휘슬씨에게 말했다.
“이렇게 은혜를 갚게 되어 영광입니다. 휘슬님.”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소. 나는 그저 이 청년의 친구라 도왔을 뿐이오.”
휘슬씨의 말을 들은 장로님은 나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휘슬님 말씀대로 좋은 눈을 가진 청년이군요. 게다가 그의 행동이 경솔하지 않은 것을 보아 영리한 청년이 분명합니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은 휘슬씨가 저보다 더 위네요.”
그렇게 웃던 장로님은 내게 말했다.
“몸은 괜찮은가? 많이 힘들면 우리 집에서 좀 쉬다 가는게 어떤가?”
장로님의 권유에, 휘슬씨는 그렇게 하라며 나를 일으켰고 그렇게 장로님 댁에서 휘슬씨와 함께 묵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