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로님 댁에서 하루
3. 장로님 댁에서 하루
장로님은 휘슬씨와 나에게 머무는 동안 편하게 지내라며 편한 침대가 딸린 방을 내주었다. 휘슬씨가 잠시 일을 보고 온다며 방을 비우고 조금은 어색하게 장로님과 둘이 남게 되었다. 촌장님은 다정하게 말을 건네주셨다.
“좋은 술을 담글 줄 안다면서?”
휘슬씨에게 대접했던 술이 떠올랐다. 비밀장소는 숲 안에 있다보니 좋은 과실을 얻기 쉬웠고 신선한 과실로 담긴 술이 달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칭찬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 얼굴이 벌개 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장로님은 크게 웃더니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었다. 아직 온몸에 상처가 그득해서 그런지 장로님의 가벼운 손짓에 조금 움찔했지만 꾹 참고, 장로님이 이어 말하는 것을 들었다.
“휘슬님은 우리 마을의 영웅이시네.”
장로님의 말은 이랬다. 15년 전쯤, 마을에 갑작스럽게 검은 용 한 마리가 공격을 해왔고, 용과 싸워 마을을 지켜낸 것이 휘슬씨라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마을 사람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마을의 백작님과 둘이서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휘슬씨가 싸우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휘슬씨의 용맹한 모습을 본 청년들이 장로님께 무용담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검은 용이 죽은 뒤에도, 휘슬씨와 용병들은 마을에 남아, 마을 보수를 위해 백작님과 직접 대면해 비용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으로 피폐해진 마을을 도와줬다는 것이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휘슬씨와 그랜트였다. 그랜트는 내 몰골을 보고는 내 손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아.”
내가 웃음 지으며 말하자 그랜트는 내 손을 더욱 꽉 쥐고서 이를 악물고 울었다. 그리고 모두 그랜트 자신 때문이라며 자학하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휘슬씨가 위로해줬다. 장로님께서는 물을 덥혀뒀으니 몸이라도 담그고 오라며 나를 데리고 갔고, 그랜트의 울음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괜스레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틀간 힘들었는지 참았던 눈물이 한참 흘러내렸다. 휘슬씨에게는 과분할 만큼 도움을 받았다. 단순한 인사로는 부족할 만큼 큰 선물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가볍게 몸을 씻고 방에 돌아오니 침대 두 개 옆에 얇은 이불이 하나 깔려있었다. 그랜트는 그새 이불위에 자리 잡고서, 이불은 자신 거라며 이불을 몸에 꽁꽁 동여맸다. 그 모습에 휘슬씨도 나도 크게 웃음이 터졌다.
“잠들기 전에 내가 자네의 상처를 좀 봐도 되겠나?”
나는 머뭇거리며 상처들을 보여줬고, 휘슬씨는 내 몸에 난 상처들을 보더니 짧게 혀를 찼다. 어제오늘 다친 상처들뿐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에게 맞아 깊게 패인 상처들을 본게 분명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휘슬씨의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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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장로님이 묵게 해주신 침대가 포근했기 때문이었는지, 나는 깊은 잠에 들었다. 결국 내가 가장 늦게 일어났다. 놀란 나머지 서둘러 자리를 옮기자 식탁에는 맛스러운 음식들이 한가득 이었고, 촌장님은 마음껏 먹으라며 권해주셨다. 이렇게 대접을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곤란해 하고 있으니, 휘슬씨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며 의자를 퉁퉁 내려쳤다. 나는 자리를 잡고서 음식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고, 휘슬씨는 내가 너무 말랐다며 내 그릇 위로 고기들을 담뿍 담아 올렸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고기들을 정신없이 먹다가 배가 부를 즈음이 돼서야, 식탁에 그랜트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 먼저 마을로 돌아갔네.”
바쁜 와중에도 나를 걱정해 만나러 와준 그랜트가 고마웠다.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에 단단히 배를 불리고 떠나려던 순간, 장로님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부부로 보이는 두사람은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사람들이었다. 장로님은 그들을 향해 깊게 인사를 올리더니 내게 말했다.
“우리 마을의 백작님과 백작부인이시오.”
나는 서둘러 둘에게 고개를 숙였고, 백작님께서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휘슬의 친구면 나에게도 친구니 그렇게 격식 차릴 것 없소. 어제 큰 부상을 입었다고 듣고, 부인이 치료마법을 조금 쓸 줄 아니 치료해주려고 들렀소.”
치료마법은 신녀님과 소수의 마법사들만이 할 수 있는 고급 마법이었다. 작은 마법으로도 큰 상처들이 치료되기에 큰 비용이 들었다. 과분한 대접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휘슬씨께서 괜찮다며 나를 백작부인 앞으로 살짝 떠밀었다. 백작부인은 나를 보고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내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짝 얹었다. 따스한 기운이 몸에 흐르고 몸살이 난 것처럼 뻐근했던 몸이 가벼워졌다. 놀라운 마음에 팔을 걷자 농사일을 하다 크게 베었던 상처가 나아있었고, 크고 작은 상처들이 모두 사라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