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약속
17. 약속
* 백작 시점
옆 마을에서 신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한 건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신전에서는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신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신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신전이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고작 어린아이에 불과한 신녀를 데리고 맹목적이고 위험한 짓거리를 해왔던걸 직접 봤다.
며칠 전, 왕국의 유일한 핏줄인 황태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로 모든 신하들이 왕궁에 소집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린 신녀의 신성력으로 황태자의 병이 고쳐지는 것을 모두 눈으로 보았으며, 기적으로 여겼고 고마워했다. 하지만 신전측은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기적을 빌미로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입에 담았다.
“왕가는 신전에 큰 빚을 졌으니, 신전에 기부금으로 천 골드를 주시오. 그리고 여기 모인 귀족들도 각자 백 골드씩 기부금을 내셔야 합니다. 만약 내지 않으면 여신 엘렌님께서 노하시여 큰 병을 내릴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집안에 여신님의 가호를 받기 위해선, 각 가문의 차남들, 혹은 가문의 차기 당주들을 신전에 귀속시켜 여신님의 가호를 받으십시오. 만약 그리하지 않으면 큰 화가 내릴 것입니다!”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차남이나 당주를 신전에 귀속시킨다? 결국에는 각 가문에 인질을 잡겠다는 이야기였다. 반년 안에 결정을 내리라던 신전장의 비열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아니 꼬았던 신전이었는데, 이렇게 신녀를 잃어버렸으니 애가 타겠지. 나는 신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신녀 납치, 진짜 잘했다. 너희는 정말 좋은 일을 한 거야!”
내 칭찬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자신을 그린이라고 소개한 아이는 당황한 듯 아직도 나를 향한 칼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린, 이 아이의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봤다 싶었다. 몇 년 전 옆 마을에 쉬러 갔던 휘슬이 제자로 들이고 싶었던 아이가 있었다고 했다. 이름이 그린이라고, 눈빛이 좋고 의로운 아이라고 소개했었다. 이 아이였구나. 호기롭고 당돌한 아이. 눈빛도 또렷하니 참 마음에 들었다.
“꼬마야, 칼은 이제 그만 내려놓는 게 어떠냐, 나는 너희가 신녀를 우리 백작가로 데려 온걸 환영한다. 너희의 용기 있는 행동에 상을 내려주고 싶을 정도야. 그러니 휘슬이 올 때까지 편하게 쉬거라. 너희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내 말에 당황한 그린이 그제야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칼을 향한 것을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아이답지 않은 노숙한 행동은, 나이에 맞지 않게 그만큼 맘고생을 했을 게 분명했다. 안쓰러운 마음이 피어올랐다. 게다가 그린도 그렇고 다른 아이도 그렇고 둘다 삐쩍 말라 안쓰러울 정도였다.
잠시 서로 귓속말을 하던 아이들은 이내 결심한 듯, 내 뜻대로 하겠다고 했다. 기특한 꼬마들 같으니라고!
“시종장, 이 아이들을 씻겨주고, 저녁도 후하게 대접해줘요. 방은 며칠 전에 휘슬이 묵었던 그 방이 좋겠네. 안내해주고.”
아이들은 자신들에게는 과한 친절이라며 물려달라며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너희 아까 귓속말 한 거 다 들렸거든? 뭐? 최악의 경우 신녀만 데리고 도망친다고? 그래, 도망치던 뭐가됐던 배가 가득 불러야 뭘 하던가 하지 않겠냐?”
그렇게 말하고 큰소리로 웃자 아이들은 얼굴이 발개진 채로 시종장을 따라 나섰다. 나는 시종장에게 신녀를 넘기고 여자 아이니, 더욱 신경써달라고 덧붙였다.
나는 침실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책을 보던 아내는 나를 보고 한달음에 걸어왔다.
“무슨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당신이 서재로 향해서 방해하지 않으려 기다렸지요. 일은 잘 해결되었나요?”
사랑스러운 부인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를 꽉 안고 말했다.
“여보, 우리 다섯 살짜리 아이하나 키워볼까?”
내 말에 놀란 아내가 흠칫 놀랐다. 아내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회복마법을 너무 일찍 깨우친 탓에 몸이 마력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무너졌고, 마력이 몸에 익을 나이가 돼서는 몸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있었다. 나와는 서로 첫눈에 반해서 결혼까지 한 운명의 여인, 하지만 늘 내 자식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에 줄곧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는 후계는 필요하지 않겠냐며 첩을 두자고까지 직접 말하곤 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다른 사람을 품을 수 있냐며,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달라며 서로를 끌어안고 울곤 했다.
오늘 신녀를 품에 안아보자, 이렇게 순한 아이라면 아내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로 인한 상처를 더 이상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한 권유였다.
“오늘 소란은 휘슬을 만나러 온 작은 손님들이 일으킨 소란이었지. 그 가운데 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가 함께 있었다오. 그 아이는 신변에 큰 위험을 느끼는 아이라 보호할 사람이 필요해서 한번 권유해본 것이오. 휘슬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 집에 머물 테니 당신이 보고 결정하시오. 나는 당신의 결정에 따르겠소.”
아내는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고, 나는 아내를 침대에 앉히고 함께 창밖에 비치는 달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