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백작 에디스
무작정 떠난 여행길, 우리는 아직 열 살의 어린애에 불과했고, 동행인 신녀는 다섯 살배기 아기였다. 무엇보다 먼 길을 이동하기에는 자금도 부족했다. 그러다 옆 마을이 떠올랐다. 스승님은 옆 마을의 영웅으로 매년 옆 마을과 교류를 해왔다고 했다. 옆 마을이라면 먼 거리도 아니니 우리가 걸음만 빨리 한다면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옆 마을로 가자. 그곳이라면 방법이 있어.”
내 제안에 그랜트는 알겠다고 말했고, 우리는 번갈아 가며 신녀를 품에 안고 이동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옆 마을에 도착했고, 나는 그랜트를 이끌고 백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입구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백작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꼭 전할 말이 있습니다.”
내가 큰소리로 백작님을 만나게 해달라며 외치자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하지만 나나 그랜트도 어린아이였고, 무엇보다 내 품에 잠들어 있는 신녀는 갓난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어린 우리들을 차마 내쫓지도 못하고 시종들은 허둥댔고, 그 사이 백작님이 직접 우리를 찾아왔다.
“모두 자신들의 일로 돌아가도록 하게. 너희들이 날 만나고 싶다고 했지? 더 이상 소리 지르지 않아도 괜찮으니, 따라 오거라.”
우리는 백작님을 따라 이동했고, 백작님은 자신의 서재라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고?”
백작님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표정에 덜컥 겁을 먹었지만 이를 악물어 정신을 차리고서 말했다.
“저희는 꼭 휘슬님을 만나야 합니다.”
스승님의 이름을 대자 의외라는 듯이 백작님의 표정은 조금 장난기 있게 바뀌었다. 살며시 미소 짓고선 말하는 목소리에 장난기가 서려있었다.
“나를 찾아와서는 휘슬을 찾는다라, 어째서지?”
백작님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차마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한들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귀족 불경죄로 큰 죄를 받을 지도 몰랐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백작님은 계속 내 행동을 살펴보다가, 이내 한껏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상황에 나도 그랜트도 어리둥절해져 멀뚱멀뚱 백작님을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 재밌는 일이 떠올라서 말이야. 그리고 너희가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도 예술이었고.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아. 나는 너희를 해칠 생각이 없어. 하지만 어째서 휘슬을 만나고 싶은지 다시 묻고 싶은데?”
다시금 스승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요청에 대한 물음이 돌아왔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그랜트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나도 결국 입을 닫아버렸다. 백작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우리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신녀를 향해 시선이 멈췄고, 신녀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백작님은 우리에게 말했다.
“좋아, 휘슬을 만나게 해주지. 다만 휘슬이 마을을 떠난 지 얼마 안됐어. 다시 돌아오려면 며칠이 걸릴 거다. 그러니 너희는 휘슬이 올 때까지 우리 백작가에서 머물도록 해라.”
백작가에서 머물러도 괜찮은 것일까? 과거에 잠깐 봤던 백작님, 그리고 백작부인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도리어 무상으로 날 치료해줬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믿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스승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유일한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선뜻 그렇겠다고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신녀를 데리고 도망친 도망자다. 만약 신전에 신녀를 들키게 된다면? 미래를 바꾸기는커녕 지금 당장 목숨이 달아날지도 모를 일이다.
한참동안 모두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백작님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가, 신녀를 품에 안고 말했다.
“이 아이, 옆 마을에서 사라진 신녀 맞지?”
백작님의 말에 나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나는 칼을 손에 꽉 쥐고 백작님을 향해 겨눴다.
“아이를 돌려주세요!”
백작님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마을까지 신녀가 사라진 게 벌써 소문으로 돌았지. 그리고 신녀와 인상착의가 똑같은 여자아이가 갑자기 나타났다? 아이를 데리고 이동하느라 걸음이 늦어졌을 테니, 아무리 옆 마을과 가까워도 우리 마을까지 도착하는데 시간은 꽤 걸렸겠지, 안 그래?”
백작님이 하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크게 문제가 될 거라면 어떻게든 신녀를 구해야만 했다. 나는 겨눈 칼을 더욱 가까이 백작에게 들이댔다. 백작님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대로 나를 베고 신녀를 되 찾아가면 문제가 해결되나? 아닐 텐데? 무엇보다 너희는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하고 너희보다 더 어린 신녀를 데리고 이동하는 데는 무리가 있겠지. 그리고 신전도 바보는 아니니 금방 너희를 찾아낼 거다. 그럼 어떻게 될까? 너희는 당장 그들에게 죽임을 맞이한다고 해도, 이 어린아이는?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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